- 본문: 이사야 13장
- 제목: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 바빌론에 대해 주어진 경고, 신탁으로 시작되는 오늘의 메시지. 사람이 창작한 작품과는 성격이 다르다. 23장까지 10개의 신탁이 세상 나라들에 주어진다.
- 2절 - 군대소집 명령
- 4절 - 그 반응으로 가득 군대가 모인다.
그런데 왜 모였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군대를 바빌론을 향한 진노를 발하는 수단으로 삼으신다.
- 6~10절은 바빌론 심판의 날에 대한 묘사.
손발에 힘을 잃고 촛농처럼 마음이 녹아내리는 상황. 바빌론에 주어지는 심판은 피할 수 없고 감당 못할 수준이다.
- 14~15절은 도망하는 이들도 살아남지 못하리라는 내용을, 16절은 그 자녀에까지 심판이 미친다는 내용으로 철저한 심판이 묘사된다.
* 11절은 하나님이 진노하신 이유가 드러난다.
☞ 악과 교만과 강포.
- 여기서 교만은 자신의 분수를 넘어서 이웃과 하나님을 무시하는 태도. 피조물이 창조자에 대해서 갖는 교만... 하나님과 겨룰 수 있다는 태도. 사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자존.. 자기충족..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이 궁극이 될 수 있다는 생각.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발상, 사람이 곧 하늘이다, 우주의 중심이다.. 인본주의가 과하게 흘러가면 인간의 한계와 연약에 대한 인식과 그로부터 오는 겸손을 잃게 한다.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게 된다.
하나님과 겨루는 자들.. 그들에 바빌론과 같은 운명이 따르게 될 것이다.
- 강포 : violence, ruthless 즉 폭행과 무자비함.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을 잊은 교만도 큰 죄이지만 이웃의 존엄, 가치를 파괴하는 공격과 인권유린 또한 하나님이 역겨워 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피조물로서 자기 한계를 인식하고 하나님을 찾기 원하시지만, 또한 그 피조물인 사람을 한 없이 사랑하신다.
물리적 강포뿐 아니라 우리의 말투, 눈빛에서 타인을 대할 때 강포가 스며들어있지 않은지 잘 살펴보라.
* 17절은 메대 사람들을 수단으로 삼은 바빌론 심판이 예언된다. 아무런 대가나 조건에 대한 기대도 없는 심판만이 목적인 철저한 심판이 내려진다.
11장은 세상의 재편과 회복에 대한 메시지였는데 13장과 연결된다. 그 재편과 회복은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이뤄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상을 보면 무질서하고 참 불의한 모습이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질서를 회복, 재편하실 것을 말씀하신다. 불의한 세상에서 좌절하고 막 살아버리는 것이 아니라 13장의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하라.
* 이사야서는 아하스왕과 히스기야왕이 부각된다. 앗수르의 팽창 앞에 강대국의 편에 설 것인지, 하나님의 편에 설 것인지 도전을 받은 왕들... 이 가운데 주어진 13장은 독자들에게 아래의 메시지를 던진다.
1. 찬란한 제국의 겉이 눈을 가릴 수 있지만 그 이면에 하나님을 떠난 문화와 현상이 있을 수 있다. 그 화려함, 유력함, 칭찬에 현혹되기 쉬우나 그 내면에는 강포와 폭력, 추한 것으로 채워져 있진 않은가. 하나님을 떠난 바빌론과 같은 실상일 수 있다. 외면과 실상을 가려내는 눈이 필요하다. 결국 하나님께 연결되지 않은 것은 아닌지를 돌아보라.
2. 19절과 21절을 보라. 찬란한 문명에 주어진 심판 뒤에 남은 폐허. 덧없는 결과.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지 않은 영화는 순간적인 것에 불과하다. 소돔과 고모라처럼. 현재 바빌론처럼 그 흔적도 찾을 수 없이 바람처럼 덧없이 사라져 버린다. 영원한 것을 좇아야 한다.
3. 떠오르는 신흥 강세, 젊은 청년같은 바빌론의 몰락은 당시 믿기 힘든 예언이었다. 그러나 결국 열방을 공의로 다스리시는, 반드시 그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보여준다. 바빌론의 전성기를 이끈 느부갓네살도 그 교만으로 인해 심판을 겪고 결국 하나님을 인정하고 만다.
나는 누구 편에 설 것인지 선택을 요구 받는다. 관념적 선택이 아니라 삶에 구체적 선택이어야 한다. 내 시간과 정신과 생각과 행동, 노력, 물질의 투자등은 어느 쪽에 기울여 있는가 돌아보라.
세상의 길이 아니라 하나님을 선택하고 따르며 우리에게 주어진 한정된 자원을 영원한 나라를 위해 사용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자.